1907년 핀란드 의회선거
핀란드 단원제의회 초대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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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단원제의회 초대선거(핀란드어: Suomen yksikamarisen eduskunnan ensimmäiset vaalit 수오멘 윅시카마리센 에두스쿠난 엔시매이세트 발리트[*])는 1907년 3월 15일에서 16일 사이에 투표가 진행된 핀란드 역사상 최초의 보통평등선거로, 이 선거로써 핀란드 제1대 의회가 개회하였다. 이 선거에서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보장했고, 의회 정원의 약 1할인 19명의 여성 의원을 세계 최초로 당선시켰다.
배경
핀란드의 입법부는 원래 스웨덴령 핀란드 시절 설치된 사원제 신분제 국회가 있었다. 1905년 총파업으로 입법제도 개혁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대공 니콜라이 2세가 11월 선언을 통해 개혁을 윤허함으로써 1906년 이루어진 의회개혁으로 국회는 폐지, 정원 200석의 단원제 의회로 대체되었다. 비슷한 시기 종주국인 러시아에서도 러일전쟁의 패배로 인한 1905년 혁명으로 의회인 두마가 신설되었다.
핀란드의 모든 정파가 개혁 내용에 동의했고 선거는 1907년으로 예정되었다. 1906년 의회개혁은 제1차 러시아화 정책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1899년부터 핀란드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해 핀란드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1904년 핀란드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기도 했다.
1906년 의회개혁 이전의 입법부인 국회는 귀족, 성직, 시민, 농민의 4개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세기에는 이미 낡은 제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너무 적어서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새로 설치된 단원제 의회는 24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평등하고 보통한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때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뉴질랜드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 유럽에서는 첫 번째로 여성의 선거권을 보장했으며, 동시에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선거제도
투표 방식은 단기명투표제와 선호투표제의 절충이었다. 선거권자는 하나의 정당을 붉은 선으로 그어서 투표하거나 또는 선호하는 순서대로 후보 세 명의 이름을 써서 투표할 수 있었다. 또 후보자 목록에 목록에 이름이 없는 사람도 투표용지에 이름을 적어서 투표할 수 있었다. 이후 표를 추산하고 의석을 배분하는 데는 돈트 방식이 사용되었다.
선거운동
19세기-20세기 핀란드 정계에서는 언어갈등이 중요 의제였다. 핀란드당(SP)과 스웨덴계당은 태생부터가 각각 페노마니아(핀란드어 운동)와 스베코마니아(스웨덴어 운동) 세력들이 정당으로 탈바꿈된 것이었다. 자유당이라는 자유주의 정당도 있었지만 5년만에 해산되었다. 이후 핀란드당에서 청년 핀란드당이 분당되어 나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899년 핀란드 노동당이라는 좌익정당이 창당된 것이다. 노동당은 1903년 핀란드 사회민주당(SDP)으로 개칭하고 도시의 노동계급과 농촌의 무토지 인구(소작인, 머슴)를 대변하려고 했다. 노동자들이나 무토지 농촌 인구들은 기존의 국회를 통해 대변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들 하위계층은 보통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1906년에는 소토지 농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농업동맹(ML)이 창당되었고, 같은 해 스웨덴계당이 스웨덴인당(RKP)으로 개칭했다. 선거운동은 주로 사회 현안에 관한 예증과 러시아 제정의 동화정책에 대한 자당의 입장을 밝히는 것 위주로 이루어졌다
결과
핀란드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의 결과는 다소 놀라웠다. 200석 중 사회민주당이 80석을 차지하여 1위로 원내 최다 세력이 되었다. 이것은 즉 그전까지는 제도권 정치 내에서 자신들의 민의를 대표할 방법이 전무했던 도시 노동자들과 무토지 농촌 인구를 대변하는 정당이 의회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파 정당들 중에서는 핀란드당이 59석, 청년 핀란드당이 26석, 스웨덴인당은 24석을 받았다. 농업동맹은 9석을 받았지만 이후 급속히 성장해 주요 정당으로 자리매김한다.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
---|---|---|---|---|
사회민주당(SDP) | 329,946 | 37.03 | 80 | |
핀란드당(SP) | 243,573 | 27.34 | 59 | |
청년 핀란드당(NSP) | 121,604 | 13.65 | 26 | |
스웨덴인당(RKP) | 112,267 | 12.60 | 24 | |
농업동맹(ML) | 51,242 | 5.75 | 9 | |
기독교노동자동맹(SKrTL) | 13,790 | 1.55 | 2 | |
기타 | 18,568 | 2.08 | 0 | |
계 | 890,990 | 100.00 | 200 | |
유효표 | 890,990 | 99.07 | ||
무효·기권표 | 8,357 | 0.93 | ||
총 투표 | 899,347 | 100.00 | ||
투표등록인수/투표율 | 1,272,873 | 70.65 | ||
Source: Mackie & Rose[1] |
한편 여성들 역시 약속된 대로 부여된 평등한 피선거권을 누려, 200석 중 19석에 여성 의원이 당선되었다. 19명 중 9명은 사회민주당이었고, 나머지 10명은 우익 정당이었다. 해당 19인은 다음과 같은데,[2] 이 19명은 핀란드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여성 입법부 의원이기도 하다.
- 사회민주당 9인: 이다 알레텔료(1885년생–1955년몰), 아니 후오타리(1874년생-1943년몰), 미미 카네르보(1870년생-1922년몰), 예뉘 누오티오(1882년생-1948년물), 마리아 파소라이네(1868년생-1945년몰), 힐리아 패르시넨(1876년생-1935년몰), 마리아 라우니오(1872년생-1911년몰), 산드라 레흐티넨(1873년생-1954년몰), 미나 실란패(1866년생-1952년몰)
- 핀란드당 7인: 에벨리나 알라쿨류(1867년생-1940년몰), 헤드비히 게프하르트(1876년생-1961년몰), 알렉산드라 그리펜베리(1857년생-1913년몰), 리시 키비오야(1859년생-1925년몰), 힐다 캐키코스키(1864년생-1912년몰), 힐마 래새넨(1877년생-1955년몰), 이다 베멜푸(1868년생-1924년몰)
- 스웨덴인당 1인: 다우마 네오비우스(1867년-1939년
하지만 원내 다수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그 기쁨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이듬해부터 제2차 러시아화 정책이 개시되어 러시아 제정은 다시 압제를 시작했다. 제2차 압제기(1908년-1917년)에 니콜라이 2세는 핀란드 의회를 누차에 걸쳐 해산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의회가 개회되지 못했다. 결국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자치령 시기 막바지인 1907년에서 1917년까지 10년간 원내 다수당이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개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그 결과 보통선거를 통해 드디어 자신들의 민의가 대변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 하층계급 민중들은 의회정치에 환멸했다. 이것이 1918년 핀란드 내전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2006년, 핀란드 의회 100주년 기념주화가 발행되었다. 주화 도안에는 남자와 여자의 실루엣이 손을 잡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는 모습이 새겨졌다.
각주
- v
- t
- e
- 이다 알레텔료
- 마티 알토
- 에마누엘 아로마
- 비흐토리 아로마
- 보이토 엘로란타
- 올리베르 에로넨
- 세트 헤이킬래
- 빌레 헤이모넨
- 에드바르드 헬레
- 마티 호이카
- 에베르트 호카넨
- 안니 후오타리
- 칼레 페테르 후투넨
- 사물리 해키넨
- 안티 해맬래이넨
- 헤이키 해위뤼넨
- 카를 구스타프 회이예르
- 알베르트 잉만
- 오스카리 얄라바
- 오스카르 요한손
- 요수아 얘르비넨
- 타베티 칼리오코르피
- 밈미 카네르보
- 안스헬름 카니스토
- 유호 키르베스
- 유호 코무
- 알빈 코포넨
- 프란스 코스키넨
- 유호 락소
- 아르비 라흐티넨
- 오스카리 프레드릭 라이네
- 빌호 라이네
- 산드라 레흐티넨
- 오스카리 레이보
- 헤이키 린드로스
- 아테 만테레
- 야네 마르티카이넨
- 유시 메리넨
- 안티 매켈린
- 비흐토리 매켈래
- 카를레 맨튀
- 페카 뫼뫼
- 요엘 나랄라이넨
- 산테리 누오르테바
- 오스카리 오라스마
- 마티 파시부오리
- 마리아 파소
- 안티 파르타넨
- 페나 파우누
- 약코 에밀 페르틸래
- 발프리드 페르틸래
- 에마누엘 포햐배레
- 힐리아 패르시넨
- 프란스 란타넨
- 마리아 라우니오
- 타비 리사넨
- 칼레 살미넨
- 아로 살로
- 미나 실란패
- 아토 시렌
- 위리외 시롤라
- 아르투리 시베니우스
- 아펠리 수오말라이넨
- 바실리 수오사리
- 타비 타이니오
- 배이뇌 탄네르
- 파보 티카넨
- 오스카리 토코이
- 마티 투르키아
- 예뉘 누오티오
- 닐스 로베르트 아브 우르신
- 네스토리 발라바라
- 알빈 발랴카
- 에드바르드 발파스해니넨
- 비흐토리 비타넨
- 술로 부올리요키
- 배이뇌 부올리요키
- 에벨리나 알라쿨류
- 유호 에르키 안틸라
- 유하니 아라얘르비
- 요한 리카르드 다니엘손칼마리
- 한네스 게브하르드
- 헤드비그 게브하르드
- 알렉산드라 그리펜베리
- 헤르만 하쿨리넨
- 에밀 헬키외
- 아우쿠스티 힐툴라
- 아우구스트 혤트
- 이사키 호이카
- 라우리 잉만
- 알프레드 오스발드 카이라모
- 카를로 카레스
- 배이뇌 키빌리나
- 리사 키비오야
- 카를레 크누틸라
- 알렉산테리 코이비스토
- 에마누엘 콜키
- 힐다 캐키코스키
- 알렉시 캐퓌
- 아르투르 라게를뢰프
- 오스카리 라이네
- 유호 레피스퇴
- 악셀리 리스토
- 빌헬미 말미바라
- 카를레 뮐륄래
- 에른스트 네반린나
- 다니엘 뉘캐넨
- 아테 올코넨
-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 올리 파야리
- 에른스트 팔멘
- 햘마르 가브리엘 팔로헤이모
- 투오마스 포흐얀팔로
- 에르키 풀리넨
- 사멜리 라얄라
- 유호 라니코
- 프란스 라폴라
- 빌호 레이마
- 헤이키 레포
- 유스투스 리파티
- 요제프 룬티
- 빌호 시필래
- 미코 시포넨
- 미카엘 소이니넨
- 마티 테르바니에미
- 유호 토르파
- 유호 툴리코우라
- 유호 에르키 바랄라
- 이사키 바헤
- 이다 베멜푸
- 아르투리 헤이키 비르쿠넨
- 요하네스 빌스크만
- 아르투르 올리베르 부오리마
- 유시 윌리코르피
- 에이노 사카리 위리외코스키넨
- 위리외 코스키넨 위리외코스키넨
- 페카 아흐마바라
- 산테리 알키오(1907년 탈당)
- 구스타프 아로칼리오
- 우노 브란데르
- 요나스 카스트렌
- 에로 에르코
- 루키나 하그만
- 유호 하베리
- 사무엘 헤이스카넨
- 네스토르 후포넨
- 미코 쿠틸라
- 카를 빌리암 코스켈린
- 피에타리 쿠이스마
- 페카 레패넨
- 알베르트 루오마
- 안티 미콜라
- 알리 니시넨
- 페카 페나넨
- 마티 페소넨
- 헤이키 렌발
- 타흐보 리헬래
- 에밀 네스토르 세탤래
- 유호 스넬만
-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 칼 빌랴카이넨
- 카를로 비크만
- 프란스 알로스
- 크리스티안 폰 알프탄
- 알프레드 요하네스 베크
- 악셀 세더베리
- 레오 에른로트
- 에른스트 에스트란더
- 프리돌프 구스타브손
- 레인홀드 헤드베리
- 칼 율리안 칼손
- 아르비드 네오비우스
- 다우마 네오비우스
- 오스카르 닉스
- 야콥 네스
- 칼 올례마르크
- 게오르그 구스타브 로젠퀴스트
- 빌헬름 로젠퀴스트
- 요한 빌헬름 루네베리
- 오스카르 슐츠
- 에밀 슈위베리손
- 오토 슬레티스
- 요한 스토르비외르크
- 율리우스 순드블롬
- 칼 쇠데르홀름
- 오스발드 바사톄르나
- 산테리 알키오(1907년 입당)
- 유호 헤이키넨
- 퀴외스티 칼리오
- 오토 카르히
- 헤이키 키스키넨
- 유하니 레팰래
- 칼레 쿠스타 퓌캘래
- 아우구스트 라티카이넨
- 힐마 래새넨
- 라우리 투나넨
- 카를로 헤이니넨
- 마티 메리비르타